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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옛 광주교도소 view
Re—View of the Old Gwangju Prison, 2022.(*English blow)


유경남(전남대 사회학과 박사수료, 전남대5‧18연구소 연구원)


교도소: 보이지 않는 사회, 누구나 갈수도 있는 곳, 가봐야만 알 수 있는 곳
 
  사람이 공간을 만든다. 한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예의, 규칙, 법 등 여러 가지 규범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서로 간의 이해가 상충할 경우, 또는 이를 대비하여 서로 지켜야 할 ‘약속’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대 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혼란을 방지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동생활의 한 기준으로 법이 존재한다. 법은 지켜져야 하는 강제력을 띄고, 법을 어겼을 경우 사법적 판단과 그에 따른 벌을 받게 된다. 이 형벌권은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데, 생명형(사형), 자유형(징역, 금고, 구류), 재산형(벌금, 과료, 몰수), 명예형(자격상실/정지) 등으로 그 종류를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신체형으로서 징역형을 판결 받았을 경우, 국가는 범법자의 법(이)익을 박탈하고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회’로 보낸다.
 
  이것이 감옥, 과거 형무소라 불리기도 했던 오늘날 “교도소”라는 곳이다. 따라서 법이 작동하고 있는 사회라면, 어디에든 ‘감옥’, “교도소”가 있다. 이 ‘교도소’라는 공간은 법을 어기기 전까지는 체험할 수 없고, 쉽게 볼 수도 없는 ‘보안 시설’이다. 전통시대 공개적 장소에서 벌을 집행하거나 개인의 신체에 죄를 새겨 넣었다면, 근대 이후에는 ‘형벌권’의 관리자들은 ‘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지시켜 스스로 법을 지키게 만드는 비가시적인 벌의 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한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은 사회에서 보이지 않게 격리하는 것이, 법의 유지와 불법(자)의 관리에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근대 형벌권의 관리자들은 사회 안에 있지만,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사회, 가봐야만 알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왔다.
 
  광주에 근대적 ‘감옥’이 생겨난 것은 1908년 광주 관아의 감옥시설에 “광주감옥”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이다(개청). 광주감옥은 1912년 5월 광주시 동구 동명동 200번지에 근대식 건물로 새로 지어 이전하였고, 1923년 관계 법령에 따라 “광주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주형무소는 8‧15광복과 한국전쟁에도 유지되었다가, 1962년 다시 “광주교도소”로 이름을 바꾸고, 1971년 북구 문흥동 88번지로 신축 이전하였다.

  전국의 ‘감옥’은 비슷한 변경과 이동의 과정을 거치는데, 2000년대 이후 교도소가 자리한 도시의 팽창과 시설의 낙후, 교정 정책의 변화 등 사회적 요구에 따라 차례로 신축이전을 하게 되었다. 광주교도소의 경우 2015년 10월 삼각동으로 이전하였고, 다른 교도소들과 마찬가지로 옛 교도소 터에 대한 활용문제가 지역 사회의 이슈로 떠올랐다.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의 어떤 교도소는 영화 세트장으로 상품이 되기도 했고, 또 다른 교도소는 도시재생사업을 거쳐 수십 층의 주상복합 아파트로 개발되면서 ‘자본’이 되기도 했다.  이곳의 이름이 감옥 → 형무소 → 교도소로 바뀐 것은 ‘죄인을 가두어 두는 곳’ → ‘형을 집행하는 곳’ → ‘가르치고 이끔; 교정‧교화’ 등 형벌의 목적이 변화되었음을 암시한다. 그 장소가 점차 도시 외곽으로 이동하는 것은 도시의 개발, 팽창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교도소가 사라지는(옮겨가는) 것도, 어디로 가는지도 관심이 없는 걸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안가 봐서 잘 모르니까? 그냥 뭐 ‘교도소’니까?

광주 ‘교도소’의 이동
(동명동 → 문흥동 → 삼각동) 



출처: 네이버(지도)

1900년대 초 광주감옥


출처: 광주교도소(2009)

신축 광주형무소(1930년)


출처: 동아일보(1930.02.20.)

지도에 나온 광주형무소(1945년 이전)
 



출처: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상설전시실

동명동 옛 광주형무소 터(동명동 200번지)
 



출처: 네이버(위성사진)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문흥동 88번지)
 



출처: 광주교도소(2014)

가려져 있는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1971~2015)
 

출처: 네이버

삼각동 신축 광주교도소 조감도(2015 ~ )
 



출처: 광주교도소(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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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져도 되는 장소 그리고 기억
 
광주에서 ‘감옥’(1908년)은 “형무소”(1923~1962), “교도소”(1962~)라고 불리며 존재하고 있었지만, 100년이 넘는 도시의 역사 속에서 교도소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많지 않다.
 
표1 : 광주 “형무소”,“교도소” 관련 주요 신문기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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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 우리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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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 아쿠아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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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아트 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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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 선택적으로 기록되는 것처럼, 위의 기사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는 교도소의 역사에는 빠져있다. 그런데 1923년 전남 신안군 암태도 소작쟁의 관련자들과 1926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학생들이 갇혔던 곳은 동명동 광주형무소였다. 지역의 유명 남녀 고등학교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관한 기념 공간이 있지만, 당시 학생들이 ‘광주형무소’에서 다른 범죄자들과 어떤 생활을 해야만 했는지는 그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없다. 1980년 5.18 당시 ‘폭도들에 의해 공격받았던 곳’으로 왜곡되었던 문흥동 광주교도소는 1999년 5.18사적지 제22호로 지정되었다. 계엄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던 곳으로 4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관련 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나, 5.18항쟁 당시 많은 사람이 이곳에 불법 구금되었던 사실과 5.18 관련자들이 1년 가까이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권위주의 정부 시기, 수많은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이 이곳에 투옥되었던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저녁마다 조사받으러 다니면서 오늘 총으로 쏴서 죽여버리려나 그런 생각 때문에... 제가 (국군)통합병원에 갔을 때는 너무 많이 힘들어 가지고 정말 그때는 제가 막 자살까지도 생각을 하고... (교도소에 있으면서) 가장 정말로 힘든게....무슨 소리가 이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면은 그 공포라는 게 말도 못해요. 어느날 갑자기 데리고 나가서...(죽일지도 모르겠다는 무서움...) 이렇게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 철커덩 소리가 나는 거. 그런 소리가 정말로 무서웠어요. 무섭다는 것보다도 오금이 절이죠.

1980년 5‧18항쟁 참여자 박영순의 증언
그림 9 : 광주교도소(문흥동 88) 5‧18항쟁 관련자 석방(1981년 4월 3일), 故 전옥주(맨 앞 여성)와 송기숙(맨 뒤 남성)
​
출처 : 5‧18민주화운동기록관(KBS 영상 아카이브 5월의 기록)
장소라는 것은 시간하고 떨어질 수 없어요. 시간이 흘러가면 장소도 자연히 변하기 마련이에요. 그렇지만 특정한 장소는 장소 그것 자체 우리한테 기억될 필요가 있거든요. 그렇다고 그 장소를 옛날 그대로 남겨둘 수는 없죠. 시간은 자꾸 가는데 (중략) 전체를 다 남겨둘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 어떤 특정한 곳의 특정한 시간의 공간은 조금은 (지금과) 연결시켜 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광주교도소 이 자리는 60~80년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폭압적인 폭력이 횡행하고 불의가 정의 행세를 하는 (시대에), 그것에 저항했던 것과 연관되어 있는 특정한 장소가 있단 말이죠. 광주교도소 전체는 어느 시대에나 범죄자를 수용하는 곳이에요. 그러나 특정한 공간은 당시 시대 정신을 실천했던 사람들의 고통과 그야말로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있는 장소가 있단 말이에요. 리영희 선생이 새파란 보안대 상사한테 그렇게 모욕을 당한 공간은 좀 남기고, 그것들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또 저런 시대가 온다면 그걸 보면서 우리 후손들이 ‘나도 저런 고통을 기꺼이 한번 감당을 해보겠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잖아요. 이게 제일 큰 것 아니겠어요. 역사라는 것이 지가 저절로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들을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어요. ‘옳은 편에 서고 싶다’ 그런 생각을 가끔 갖게 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1970년대 후반 ‘긴급조치’ 관련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박병기의 증언
​
  박병기 선생님의 말처럼, 교도소는 언제 어디서나 범죄자를 수용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대의 잘못된 지배 질서 때문에 범법자로 취급되어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남겨져야 하지 않을까? “농장다리”(현 동지교)*라는 별명만이 과거 동명동에 ‘광주형무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할 뿐 이것도 점차 잊혀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 2016년 서울 서대문 형무소 인근의 ‘옥바라지 골목’**이 재개발되어 옛 모습이 사라져 버렸는데,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옥바라지했던 가족과 동지들의 이야기가 자리할 곳은 어디일까? 특정한 장소가 기억되는 것과 반대로 교도소와 같은 특정한 장소의 기억이 기억되지 않은 것은, 그 장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일 것이다. 교도소가 범죄자인 비정상(인)의 공간이기 때문에, 가난하고 부정한 사람들의 장소이기 때문에, 망각의 틈으로 밀어 넣어져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이것들에 대한 정상적/비정상적 기억과도 연결된 것 같다.
 
* 농장다리 : 현 동지교, 옛 형무소와 형무소에서 운영하는 농장(현 광주법원 일대)을 연결하는 연결하는 다리를 일컫는 말. 다리 밑으로 열차가 다녔다.
** ‘옥바라지 골목’ : 서울시 서대문구 무악동 45~6번지 일대로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이후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자들의 가족과 지인들이 옥바라지를 위해 잠시 기거했던 곳을 칭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문흥동 광주교도소를 지은 사람들이 당시 교도소에 수용되었던 범죄자라는 사실이다. 1967년 박정희 정권은 국토개발계획에 교도소 수형자와 소년원생을 참여시키기 위해 갱생건설단과 갱생건설소년단을 창단했고, 1968년 광주교도소 갱생건설단 지구대를 발족시켜 문흥동 88번지 신축공사에 이들을 동원했다. 1971년 7월 15일 광주교도소는 문흥동으로 이전하는데, 이 시기 국내에 신축한 교도소는 수인들이 지은 감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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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0 : 1971년 이전 당시 문흥동 광주교도소
출처 : 광주교도소(2014)
말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흔적
“길들어졌을 뿐이야(Just institutionalized)” - 영화 ‘쇼생크 탈출’ 중에서
 
국가의 은유적 움직임은 글쓰기 행위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일종의 ‘이중성’을 필요로 한다. 
즉, ‘중심에 자리한’ 어떤 인과 논리도 없이 문화 구성체들과 사회적 과정들 사이를 오가는 재현의 시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경험한 역사의 기억과 주체의 불연속적 에너지에 합당한 서사적 권위를 부여하려 한다면 세속적 해석의 언어는 ‘시각’적 틀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 호미 바바(Homi Bhabha)
  우리의 기억이 누군가에 의해, 무엇인가에 의해 선택된 것처럼, ‘교도소’에 대한 우리의 시선 역시 이미 선택되어진 것일지 모르겠다. 내가 문흥동 광주교도소에 처음 들어 갔을 때, 보이는 것은 텅빈 공간들 뿐이었다. 서둘러 사람들이 빠져 나간 공간은 차가운 시멘트와 단단한 쇠창살들 때문인데 더욱 차갑게만 느껴졌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살 수 있었을까? 감옥이 이런 곳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비일상적 공간인 교도소에 대한 호기심에 길들어져 있을 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교도소는 일상의 가장 끄트머리에, 가장 밑에서,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떠밀고, 떠받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일상의 ‘밖’으로 보내질 수 있다는 위협을 늘 갖고 살면서도, 일상 밖의 삶은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도소’를 지금까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도소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다. 교도소 밖에서 살던 사람이, 교도소에 와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교도소 밖으로 나가 살아갈 것이다. 따라서 교도소 안은 교도소 밖과 큰 차이는 없는, 잠시 다녀 가는 ‘학교’일 수 있겠다. 교도소 안과 밖이 서로를 볼 수 없다는 차이를 가질 뿐이다. 어떤 세계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질서와 질서 밖(무질서)의 영역을 관리하는 것은, 결국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힘이며, 흔히 법, 국가라고 불리며 작동하는 권력이다. 이 권력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시점은 정상들로부터 비정상을 보이지 않은 곳으로 밀어 보낼 때이다. 왜냐하면, 이 힘의 작용이 결국 정상을 정상답게, 비정상을 비정상답게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교도소는 비정상에게서 정상을 박탈해 버리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 권력은 항상 정상(인), 비정상(인) 양쪽을 향해 있다. 우리는 가혹하게 과시되거나 신체와 정신을 압박하고 체감하는 것에만 불편하게 생각했지, 보이지 않고 은밀하게 작동하는 힘에는 길들어져 왔는지 모르겠다. 저기 감옥이 있기 때문에, 내가 감옥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교도소 안과 밖을 구분하는 담이라는 시선의 틀을 넘어서 보면 어떨까? 그들도 삼시 세끼 밥을 먹고, 친구를 만들고, 희노애락을 아는 보통 사람들인 것이다. 범죄자라는 부정적 인식과 시선, 사회적 구분과 배치 때문에 이들에게 말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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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1 : 사동과 사동 사이 기결수 운동장의 과거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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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도소 안과 밖은 법의 문을 통과하고 통과하지 못한 차이일 뿐, 크기만 다르지 격자로 이루어진 각자의 공간에서, 번호가 붙여진 아파트에서, 시간에 따라 지시문의 방향대로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은 같지 않은가. 어디서 무엇을 하려고 해도, 나를 채워 넣어야 하는 네모난 칸의 ‘조사 서식’들과 나를 훔쳐보고 있는 CCTV들 속에서, 우리는 정상적인 주체로 멀쩡하게/모범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교도소의 높은 벽과 수많은 문 앞에 서야만, 우리는 이것들과 대적할 수 없는 나약한 신체와 정신을 가진 ‘법도 모르는/없이 사는’ 나약한 주체임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결국,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
참고한 글
​
 
광주교도소, 2009, 『새로운 시각으로 본 광주교도소사』, 광주교도소
광주교도소, 2014, 『광주교도소사』, 광주교도소

김진균‧정근식 외, 1997, 『근대 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제임스 C. 스콧, 2010, 『국가처럼 보기 : 왜 국가는 계획에 실패하는가』, 에코리브르
호비 바바 편, 2011, 『국민과 서사』, 후마니타스

전현욱, 2016, "식민시기 서대문형무소 주변의 옥바라지 - 이른바 '옥바라지 골목'의 역사성과 관련하여", 『도시연구:역사‧사회‧문화』 16권, 도시사학회

김윤영, “가난한 이들의 기억공간, 옥바라지 골목이 남긴 질문”, 비마이너(2021.10.06.)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27)
​Re—View of the Old Gwangju Prison, 2022.
Kyoungnam Yoo (Researcher, the May 18 Institute Chonnam National University)

This article is an experimental attempt to understand the historical and social context of the space we call “prison” through existing data regarding the former Gwangju Prison (at 88 Munheung-dong) and several field trips to the site. Gwangju Prison is a space where people who had committed illegal acts were sent, and it is a man-made space, invisible to the general public, even though it is within society, and can only be comprehended by going there. This space, as an area established to maintain order in the community and as an efficient system of management of lawfulness and lawlessness, has continued its social evolution amidst the public’s indifference. However, the abnormality and negative perception of the space of called “prison” cause related memories and history to be selectively left behind. The old Gwangju Prison (at 88 Munheung-dong), which encouraged and supported ordinary people from the very edges and deepest areas of daily life, may be an opaque mirror that reflects the image of modern-day people who live exemplary lives as normal individuals. It seems that we, who move according to the direction given by the instructions that are delivered at fixed hours to each numbered cell (their “apartment”), realize that we are individuals with weak body and mind only when confronted with the high walls and numerous doors of the prison.
​유경남 Kyoungnam YOO
 ondalpo@gmail.com
전남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전남대 사학과,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학술‧전시을 담당하는 학예연구사로 일했다. 현재 전남대5‧18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있으며, 5‧18항쟁을 주제로 국가의 기억기관 운영, 시민의 기억운동(작업)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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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ungnam Yoo received his master's degree from the Department of History at Chonnam National University and completed doctoral coursework in the Department of History and the Department of Sociology at Chonnam National University. He worked as a curator in charge of academics and exhibitions at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Archives in Gwangju. He is currently a researcher at the May 18 Institute at Chonnam National University and is preparing his doctoral dissertation on the operation of a national memory institution and a citizens’ memory movement (and projects) on the subject of the May 18 Uprising.